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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없는 전쟁 이야기

6.25 전쟁 생존자 홍혜숙 할머니

 

 

 ‘6. 25 전쟁’하면 대표적으로 1.4후퇴, 인천상륙 작전, 맥아더 장군이 떠오른다. 제한된 지면상 교과서엔 굵직한 사건들만 다룰 수밖에 없다. 민간인 희생에 대해 기술된 내용은 단 한 줄인 경우도 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수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하였고,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의 수도 1천만 명에 달하였다.”(고등학교 한국사, 비상교육)

 6. 25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전쟁이다. 한 줄로 치유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남겨진 이들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문득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었던 이야기가 궁금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현재 77세인 홍혜숙 할머니는 6.25 전쟁을 직접 겪었다. 당시 나이 여덟 살, 강원도 원주에 거주했다. 형제는 4남매로 큰 오빠가 있었다. 전쟁 때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반복했다. 그 무리 속에 계셨던 할머니다. 할머니를 노인복지회관 옆 카페로 모셨다. 주름진 얼굴은 그날의 기억을 잘 대변해주는 듯 했다.

 

 

 

 

 

 

1950년 당시 8세로 직접 6.25를 겪은 홍혜숙 할머니 (사진=서은율 기자)

전쟁의 시작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오전 즈음 원주에 도달했다. 할머니가 처음 전쟁을 맞은 곳은 봉산 국민학교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위치했다.

 수업 중 낯선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모두들 두려움에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교장 선생님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집에 가라고 소리쳤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내달렸다. 겨우 도착했을 때, 집은 폭삭 가라앉아있었다. 직접 폭격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비행기들이 원주 쌍다리를 끊어놓은 충격으로 집의 벽면이 다 무너졌다. 기둥만 남은 집에 솜이불이 보였다. 폭격이 두려운 나머지 할머니와 두 동생은 이불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때 큰 오빠가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는 막내 동생을 업고 함께 집 뒷산으로 올라갔다. 중간에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각자 큰 나무의 몸통을 하나씩 잡았다. 위에서 볼 때 눈에 띄기 쉬운 흰 옷은 다 벗어야 했다. 얼마 후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고 부모님이 4남매를 불렀다. 목소리를 따라 산등성이를 올라가 보니 새로운 마을이 나왔다. 그곳에서 초가집의 방 한 칸을 얻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집으로 인민군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집주인에게 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거절한 즉시 마구 때렸다. 이 모습이 할머니가 인민군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기억이다.

 

 전쟁 전, 할머니의 집안은 부유했다. 작은 아버지가 가진 연락선과 오징어잡이 배 덕분이었다. 직접 잡은 오징어와 고등어, 강릉에서 사온 감을 팔았다. 덕분에 이승만 박사가 그려진 지폐로 돈 방석에 앉았다.

 전쟁 발발 후 화폐교환이 있었다. 돈이 너무 많아 이웃들에게 나눠줘도 다 바꾸지 못했다. 결국 남은 돈을 불에 태웠다. 그때 부모님이 서럽게 우신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고생스럽게 번 돈이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사진 (사진=네이버)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

 

 피난을 가기 전 어느 날, 할머니는 동네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그때 큰 오빠가 신발을 갖다 달라 했다. 옆에는 외삼촌과 군인들이 서있었다. 잠시 주춤했다. 그러자 군인은 “너희 오빠 백두산에 태극기 꽂으러 가는 거야”라고 했다. 그 말에 의심 없이 운동화를 갖고 왔다. 오빠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외삼촌과 오빠는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남은 가족들은 인파 속에서 피난을 시작했다. 끊어진 쌍다리 밑 강을 헤엄쳐 건넜다. 며칠에 걸쳐 도착한 곳은 충북 음성이었다. 바로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갔다. 당연히 환경은 열악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씻지도 못했다.

 

 수용소에서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다. 목이 말랐던 막내 동생이 물을 마셨다. 하필 양잿물이었다. 사람들이 빨리 토해내게 했다. 소용이 없었다. 몇 일후 동생은 죽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쇠약해졌다. 더 이상 수용소에서 살 수 없었다. 남은 돈으로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신세를 졌다.

 

“나는 보리밥이 싫어”

 

 할머니에게 전쟁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다행히 큰 정신적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으로 인해 지금까지 싫어하는 음식이 있다. 보리밥이다. 수용소에 사람은 많은데 쌀은 턱없이 부족했다. 할머니에게 유일한 식량은 보리뿐이었다. 그러나 보리밥, 보리죽은 목에 자꾸 걸렸다. 외숙모가 보리개떡을 쪄주었지만 역시 거칠어 먹질 못했다. 대부분 굶기 일쑤였다. 그때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보리밥은 먹지 않는다.

 다시 오빠를 찾아 원주로 왔다. 폐허가 된 봉산동 대신 명륜동으로 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외삼촌과도 재회했다. 외삼촌은 전투 중 부상을 입어 오른쪽 다리 절반이 다 벌어졌다. 상처부위에 화약이 스며들어 치료가 힘들었다고 전했다. 문제는 오빠가 돌아오질 못했다. 삼촌에 따르면, 오빠는 이름 모를 산에서 전투하다 죽었다. 삼촌이 입에 군번을 넣어주고 온 게 마지막이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외삼촌과 달리 국가의 보상도 거절했다. 아들을 팔아 돈 버는 것 같아 싫어하셨다. 가장 후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전쟁 발발 후 큰 오빠는 외삼촌의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려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아버지에게 일본은 곧 죽음이었다. 오빠를 말렸다. 그때 놓아줬으면 살아있었을 것이라며 미안해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시다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의 아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은 전쟁과 가족의 죽음으로 멍들었다. 현충일은 가족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오빠와 동생은 전쟁 중에, 아버지는 전쟁 후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가족의 절반이 직간접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순간에 가족, 친구, 이웃과 이별해야했다. 전쟁으로 학업은 중단되었다. 못 배운 한도 컸다. 지금 나이에도 노인대학과 복지관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는 이유다. 만약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열심히 공부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교과서 속 내용도 중요하지만 때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책에는 담기지 못한 개인의 이야기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선 수많은 민간인 중 한 명이었던 홍혜숙 할머니.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주인공이다.

 

서은율 기자                                

(rmsmsrkqkd@naver.com)